不醉不歸(불취불귀)

-허수경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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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율법 / 윤의섭

2015. 9. 10. 20:13 from something

구름의 율법

-윤의섭




파헤쳐 보면 슬픔이 근원이다 
주어진 자유는 오직 부유(浮遊) 
지상으로도 대기권 너머로도 이탈하지 못하는 궤도를 질주하다 
끝없는 변신으로 지친 몸에 달콤한 휴식의 기억은 없다 
석양의 붉은 해안을 거닐 때면 저주의 혈통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언제 가라앉지 않는 생을 달라고 구걸한 적 있던가 
산마루에 핀 꽃향기와 
계곡을 가로지르는 산새의 지저귐으로 때로 물들지만 
비릿한 물내음 뒤틀린 천둥소리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한 떼의 무리가 텅 빈 초원을 찾아 떠나간 뒤 
홀로 남겨진 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혹은 태양에 맞서다 죽어가고 혹은 
잊어버린 지상에서의 한 때를 더듬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져간다 
현생은 차라리 구천이라 하고 
너무 무거워도 너무 가벼워도 살지 못하는 중천이라 여기고 
부박한 영혼의 뿌리엔 오늘도 별빛이 잠든다 
이번 여행은 오래 전 예언된 것이다 
사지(死地)를 찾아간 코끼리처럼 
서녘으로 떠난 무리가 어디 깃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소는 길 끝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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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호 / 국제여관

2015. 9. 10. 19:59 from something

국제여관 

-이현호

 

 

 

너를 경經처럼 읽던 밤이었지

낯선 문법에 길 잃고 자주 행간에 발이 빠져

시든 줄기 같은 문맥을 잡고, 점자인양 널 더듬거렸지

창틈으로 난입하는 빗소리에 글자들이 번져

점점 눅눅해지는 어둠을 헤치며, 너를 읽어내려갔지

폐허가 된 역사驛舍에서 너의 그림자,

검은 장미 숲으로 떠나는 열차를 기다리며

산문적이었던 삶의 비문非文들을 생각했지

레코드판같이 돌아가는 밤하늘 아래

안개는 가로등 불빛을 한 뼘 비껴 흐르고

역사歷史가 되감겨 와, 가물거리는 한 구절 경을

늘어진 테이프처럼 읊조렸지

마지막 페이지를 새긴 열차는 끝내 오지 않고

어둠의 깊이만큼 經은 또 한 번 두꺼워지는

 

 

2007 <현대시> 신인상 수상작

[출처] 이현호/국제여관|작성자 여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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